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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석님의 탄생 109돐〉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게 좋은 옷을 입히시려/김정숙평양방직공장에 새겨진 불멸의 자욱

2021년 04월 14일 08:52 공화국 주요뉴스

평양방직공장(당시)을 현지지도하시는 김일성주석님(1968년 1월)

김정숙평양방직공장은 해방후 우리 나라의 첫 천생산기지로 일떠선 공장이다.

김일성주석님께서 나라의 주인이 된 인민들의 입는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시기 위하여 평양방직공장을 세워주시였다.

공장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은혜로운 손길아래 방적, 직포, 염색 등 여러 생산공정을 원만히 갖춘 종합적인 방직공장으로, 방직공업의 기틀을 이루는 《어머니공장》으로 눈부신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몸소 잡아주신 터전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신 김일성주석님께서는 피눈물나던 해방전에 한쪼박의 천이 없어 토스레옷 한벌로 3부자가 엇바꾸어가면서 입지 않으면 안되였던 인민들을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게 내세우시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시였다.

하기에 주석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의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수도의 한복판에 큰 방직공장을 건설할 원대한 구상을 펼치시였다.

공장부지를 확정하기 위한 지질탐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공장설계가 힘있게 추진되고있던 1948년 10월 10일,

주석님께서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어리신 장군님과 함께 평양방직공장(당시)의 터전을 잡아주시기 위하여 현지에 나오시였다.

풀밭이 펼쳐진 맞은편 동쪽으로는 파괴된 제철소의 여러개의 굴뚝과 열풍로, 소형용광로들의 잔해들이 앙상하게 늘어서있었고 남쪽에는 이미 복구되여 조업을 개시한 화학공장 건물들이, 북쪽 소로길주변으로는 살림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아있었다.

주석님께서는 일군들에게 터전을 돌아보자고 하시며 몸소 길도 없는 풀밭속으로 들어서시였다.

비가 내린 뒤여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길은 더 험하였다.

그러나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깊숙이 파헤쳐진 지층의 상태까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시며 그 넓은 부지들을 일일이 다 돌아보시던 주석님께서는 여기가 좋다고, 우리 힘으로 큰 공장을 짓고 인민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자고 하시며 환하게 웃으시였다.

규모가 2배로 된 사연

평양방직공장 직포직장(1983년)

원래 평양방직공장은 3만추의 방적기와 2,000대의 직기를 놓을수 있도록 설계되였었다. 이것만도 매우 큰 규모인데 그후 규모는 2배로 확장되였다.

이렇게 된데는 가슴뜨거운 이야기가 있다.

1949년 여름 강원도 법동군의 한 산간마을을 현지지도하시던 주석님께서 마을로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이야기를 나누신적이 있었다.

그날 한 로인이 평생소원이였던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 쌀독을 가득 채우게 되고 이 심심산골에도 학교가 생겨나 자식들을 공부시켰으면 하던 소원도 다 풀리고보니 이제는 나들이옷 여벌과 이부자리가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솔직히 말씀올리였다.

그 로인의 진심이 담긴 말을 나무람하지 않으시고 신중하게 받아주신 주석님께서는 수첩을 꺼내시여 마을의 인구수와 요구되는 천의 량을 계산하시였다.

주석님께서는 평양에 돌아오신 그길로 해당 부문 일군들을 부르시여 로인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시면서 막대한 돈을 더 투자하여 평양방직공장의 방추수를 당초에 예견했던 3만추가 아니라 6만추로 하자고 결연히 교시하시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최고인민회의에서 토의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한창 건설중이던 평양방직공장이 2배나 더 크게 확장되는 사변이 일어나게 되였다.

이것은 인민들의 옷감생산문제를 절박한 문제로 내세우신 인민의 위대한 어버이께서만이 취하실수 있는 인민적인 조치였다.

주석님의 세심한 보살피심과 정력적인 지도에 의하여 1949년말에 이르러 평양방직공장 제1단계 공사가 완공되였으며 50년 3월에는 제1방적직장에서 첫 시제품인 실이 생산되고 4월부터는 부분적인 조업을 개시하는 눈부신 성과가 이룩되였다.

단 2개월동안에 복구

그런데 조업을 앞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3년간의 전쟁은 평양에 건설되고있던 공장을 페허로 만들었다.

한장의 벽돌, 한g의 세멘트가 귀중했던 당시 공장을 복구하자면 적어도 5년은 걸린다는것이 일부 사람들의 견해였다.

전후 2일만에 공장을 찾으신 주석님께서는 이곳 로동계급에게 이렇게 호소하시였다.

미제를 족치던 그 기세로 단 2개월동안에 공장을 복구하자!

주석님의 이 호소는 공장로동계급을 산악같이 일떠세웠다.

공장은 전후 짧은 기간에 복구확장되고 전쟁전에 비하여 6배에 달하는 천을 생산하는 기적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인견천도 생산

현대적으로 꾸려진 오늘의 김정숙평양방직공장 생산공정

김일성주석님의 손길아래 발전의 일로를 내달려온 평양방직공장은 김정일장군님의 령도밑에 현대화공사가 힘있게 추진되고 2010년부터는 인견천을 생산하게 되였다.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해인 2011년 5월 공장을 찾으신 장군님께서는 데트론인견천직장을 돌아보시고 못내 만족하시며 이 천을 가지고 녀성들에게 화려한 치마저고리를 해입혀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장군님께서 서거하신 직후 공장에 깃든 백두산3대장군의 령도업적을 더욱 빛내이시기 위해 평양방직공장으로부터 《김정숙평양방직공장》으로 개칭(2011년 12월 21일 정령)하는 조치를 취하시고 그후 여려차례 현지지도하시면서 로동자합숙을 꾸려주시는 등 로동자들의 생활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오늘 공장은 주석님의 념원대로 질좋은 옷감들을 꽝꽝 생산해내며 인민생활향상에 크게 이바지하고있다.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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