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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작가 김사량을 그리며/서정인

태양의 《빛속에》 영생하는 작가

사람들의 《삶》의 평가에서 많은 경우 어떻게 살았는가를 어떻게 최후를 마쳤는가에 력점을 두고 론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다. 원쑤놈들과의 판가리싸움속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럴수 있으리라.

전승 60돐에 즈음하여 지난 6월 17일부로 작가 김사량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다는 소식(《조선신보》2013.7.5)을 듣고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된것은 이 필자만이 아닐것이다.

국립출판사1954판《김사량선집》

국립출판사1954판《김사량선집》

이전에 조선신보지면에 김사량이 소개된바도 있어 독자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싶이 김사량은 본명이 김시창(時昌)이며 1914년에 《평양의 자그마한 주물공장을 경영하는 상공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에 왜놈군사교원을 배척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것으로 하여 퇴학당하였다. 그후 외국(*1931년 일본)에 가서 공부(*1933년旧制佐賀高等学입학)하였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문학창작을 시작하였고 1936년 10월에는 처녀작 단편소설〈토성랑〉을 세상에 내놓았다. 후에 이 작품이 연극으로 각색되여 상연된 관계로 일제경찰서에 수개월 구류당하였다. 1939년 봄 대학(*東京帝国大学文学部独文科)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조선일보》 학예부)기자로 활동하면서 단편소설 〈빛속에〉(1939)를 창작하였으며 이 작품이 발표된것을 기회로 그의 창작적재능이 알려지게 되였다. …》(《문학예술사전》상,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88)〔*는 필자가 덧붙였음〕

김사량은 고등학교 2학년때(20살)에 단편소설《토성랑》을 쓰고 그것을 다듬어서 대학에 입학한 해에 동인지 《제방》(堤防:당시 일본을 비롯한 온 세계를 휩쓸었던 파시즘의 물결을 막아낸다는 의미를 담았음)에 발표하였다. 작품은 그의 고향인 평양의 토성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을 생동하게 그려냈으며 조선사람이 겪는 아픔이 일제식민지통치와 략탈에 의해 빚어진다는것을 보여주었다. 바로 김사량의 자랑스러운 처녀작 단편소설《토성랑》에는 벌써 그의 애국적성격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였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작가 김사량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것은 단편소설 《빛속에》이다. 현재 일본에서도 김사량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선참으로 꼽는것이 바로 이 작품일것이다. 그 리유는 다음과 같다.

작품에는 김사량자신이라고도 볼수 있는, 南氏성을 가진 「미나미」라고 붙리우는 조선사람 대학생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일본인아버지와 조선인어머니 사이에 태여난 아이를 통하여 일본인아버지의 조선인멸시사상을 《목격》하고 비판하면서도 《남》이 아니라 「미나미」라고 불리우는데 대해 처음에는 거슬렸다가도 일본인들과 만나는 일상속에서는 일종의 《안도감》도 느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모대긴다. 그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당시 일본에서 본의아니게 조선사람이라는것을 감추면서 살았던 재일조선인들의《현실과 갈등》을 일본(인)의 조선인멸시사상과 관련시켜 형상하였다.

또한 단편소설《빛속에》는 평양에서 태여나 우리 말을 먼저 익힌 조선인작가가 일본으로 건너와서 일본말로 써서 1939년 10월에 保高徳蔵主宰동인지「文芸首都」에 발표하였다는 점, 그것이 그해에 第十回 「芥川賞」-1939年下半期候補作品(결정발표는 1940.2)이 되였다는 점(조선사람이 쓴 작품이 「芥川賞」후보에 오르기가 처음되는 일이였다.)도 빼놓을수 없다.

이제는 유명해진 이야기이기는 하나 김사량은 자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본래부터 자기의 작품이면서도 〈빛속에〉에는 아무리해도 꼭 맞지 않는것이 있었습니다. 거짓이다 .아직도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저는 이 작품을 쓰고있을 때에조차 자신에게 말하였습니다.》(《김사량작품집》문예출판사1987:앞말)

이 단편소설 《빛속에》는 서울에서 씌여졌으나 일본말로 창작되였으며 제목을 「光の中に」라고 달았기에 그것을 우리 말로 옮기는 과정을 거쳐 남조선에서는 《빛속으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사량은 어머니에게 부친 편지구절에서 일제식민지통치아래 조선민족이 겪는 비극과 고통은 작품에 그려낸 그런것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한것이리라. 김사량의 그런 심정은 이후에 발표한 단편소설 《천마(天馬)》(1940), 단편소설 《풀이 깊다(草深し)》(1940) 등에서 진실하게 표현되였다고 할수 있으며 장편기행문(항일중국기행) 《노마만리(駑馬萬里)》(1945)에서 온 몸으로 터쳤으며 가렬했던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남긴 《종군기》(1950)들에서 《거짓》이 아닌 김사량의 량심과 진심이 계속 격조높이 노래되였을것이다.

김사량은 1945년 봄에 중국대륙의 《조선학도병위문단》에 동원되였으나 탈출하여 조선의용군 선전대에서 활동하다가 광복후 귀국하였다. 1947년 10월에 평양에서 그는 《노마만리》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 사실 그때의 나로서는 내가 이렇게 살아서 이 기록을 품에 안고 돌아오게 되리라고는 기필치 못하였다. 때문에 이 기록을 적어놓던 당시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여실히 나타내기 위하여 수기의 첫머리에 쓰여있는 서문의 일부분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이 조그마한 기록은 필자가 중국을 향하여 조국을 떠난지 바루 일개월만에 적 일본군의 봉쇄선과 유격지구를 돌파하여 우리 조선의용군의 본거인 화북 태행산중으로 들어가는 로상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언제까지에 끝날 일인지 혹은 어느때에 중단될 일인지 필자역시 예기하지 못하는바이다.

그것은 우리 의용군이 잔포한 적군을 쳐물리치며 압록강을 건너 조국의 서울로 진군하는 장정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될것이로되, 그러나 이날이 언제라고 기약할수 없는 동시에 장차 우리 의용군의 뒤를 따라 붓대와 총을 들고 조국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필자의 생사 역시 포연탄우속의 일이라 단정할수 없기때문이다.

허나 만약에 불행히도 조국독립의 향연에 참례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자대신 이 기록이나마 우리 용사들의 채질하며 내달리는 병마의 등에 실려 서울로 입성하여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중략) 화북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본진》 (《김사량선집》국립출판사1954 《노마만리〈서〉》)

 조선문학사에는 김사량의 최후(일부)에 대한 서술이 있다.

조선문학사에는 김사량의 최후(일부)에 대한 서술이 있다.

김사량은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곧 종군의 길에 올라 《로동신문》을 비롯한 신문, 잡지들에 격동적인 《종군기》를 발표하였다. 작품은 인민군대와 후방인민들을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조국앞에 전략적후퇴의 시기가 닥쳐왔을 때였다. 후퇴의 길에 오른 김사량과 그의 일행은 최고사령부련락군관과 두명의 전사까지 합치여 모두 4명이였다. 이때 김사량의 몸은 인민군용사들과 함께 혈전의 고비들을 겪은 뒤끝이라 쇠약할대로 쇠약해졌다. 1950년 9월 30일경 대오가 남한강기슭에 이르렀을 때 그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의식을 회복하자 그는 결연히 당원증과 종군수첩들을 최고사령부련락군관에게 넘겨주고 수류탄을 품고 뒤에 남았》(《조선문학사11》해방후편〔조국해방전쟁시기〕사회과학출판사1994) 으며 《지리산빨찌산에서 싸우던중 적들의 포위에 들게 되자 〈김일성장군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수류탄묶음을 터뜨려 영웅적으로 희생되였다.》(《조선중앙통신》2013.6.25)

김사량의 《최후》에 대해서는 이제까지도 문학연구자들속에서 여러가지로 이야기되여왔으며 일반적으로는 《…종군수행중에 심장병이 도져 락오하여 적후에서 1950년 10월에 희생되였을것이다…》라고만 이야기되기도 하는 한편 독립군의 《연안파》였으니 사망후에 명예가 손상당하고 작품들도 빛을 못 보게 되였을것이라는 《추측》이 일부에서는 사실처럼 이야기되기도 하였다.

명확한것은 작가 김사량은 오늘 공화국영웅메달을 가슴에 번쩍이며《오각별 삼색기 펄럭이며 위대한 령수 노래부르며 바다를 향하여 전진하리라 !》(종군기《바다가 보인다》1950.9.17.중에서)고 소리높이 부르며 전승 60돐을 새로운 신심에 넘쳐 뜻깊게 맞이하고있는 조선인민들을 조국통일성업에로 힘있게 고무해주고있다는것이다.

태양의 따스한 《빛속으로》 스스로 들어와 안긴 그는 언제나 그의 작품들과 더불어《빛속에》만 존재할것이다.

(조선대학교 교수)